[컨슈머뉴스=이은주 기자] 1983년 빌 비거스태프와 로버트 메데아리스가 포커 게임 도중 떠오른 '스타트업 대상 금융업'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 것이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시초였다. 위험부담이 큰 스타트업에 담보 없이 지분을 받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면서 스타트업 특화 은행으로 성장한 SVB는 엔지니어들에게 저리로 주택과 자동차 담보 대출까지 해주면서 끈끈한 유대를 형성했다. 스타트업들은 억만장자 벤처캐피털리스트(VC)로부터 투자받은 돈을 이 은행에 예치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실리콘밸리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이후 양적완화에 돈은 흘러넘치는데 금리는 제로에 가까워졌다. 비대면 기술, AI·메타버스·코인 등에 대한 기대감으로 2021년 실리콘밸리에 엄청난 돈이 유입됐다. 스타트업들은 투자받은 돈을 관행대로 SVB에 예치했다. SVB의 총예금 잔액이 2020년 600억 달러에서 2년뒤 2000억 달러에 육박했다. 예대마진이라는 고전적 방법으로 수익을 실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미 10년물 국채 등 안전자산을 매입할 수 밖에 없었다. 2020년 270억 달러였던 이 은행의 장기채 투자금은 2021년 말 1280억 달러로 늘었다. 일반 은행들의 경우 25% 안팎인 자산 대비 증권 투자 비율이 55%까지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3월부터 미 연준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금리가 오르자 스타트업의 유동성이 나빠졌고 기업들은 현금이 필요해 예치했던 돈을 빼가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돈을 장기 국채에 묶어 뒀는데 예금주들이 돈을 달라고 하니 SVB는 손실을 감수하면서 만기 전 국채를 대량 매도해야 했다. 그리고 악화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2억5000만 달러의 신주 발행에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모바일 뱅크런’이었다. 스타트업들에 돈을 투자한 벤처캐피털리스트(VC)들이 투자 회사의 CEO들에게 돈을 빼라고 독촉했다. 스타트업들은 모바일뱅킹을 통해 빛의 속도로 인출했다. 36시간 동안 SVB 예금의 24%에 이르는 420억 달러(약 55조6000억 원)가 빠져나갔다. 첨단 기업들과 거래하는 SVB가 미 당국의 금융정책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장기채 구매라는 자금 운용방식을 택한 것이 애초의 잘못이었다면, 파산으로까지 비화한 것은 메신저를 통한 입소문과 손쉽게 돈을 뺄 수 있는 인터넷 뱅킹 때문이었다.

SVB파산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산되진 않았지만 몇가지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36시간 만에 파산을 초래하는 ‘폰 뱅크런’이 과연 남의 나라만의 일인가? 국내는 안전망을 갖췄는가 하는 물음이다. 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연관된 제2금융권의 부실 위험은 없는가? 정부가 점검해 대처할 방법은 있는지 걱정이다. 스위스 은행 167년 역사를 자랑하는 크레디트스위스(CS)도 몰락했다.

블랙스완은 상존한다.

한은이 23일 발표한 3월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금융불안지수(FSI)’가 5개월 연속 ‘위기’ 단계를 이어갔다. 한은은 “국내외 금융 여건이 악화하면 취약부문을 중심으로 신용과 유동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동시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금융,통화당국 수장들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주재했다.

위기에 잘 대처하는 유능한 소방수를 기대하는 것이 혼자만의 꿈이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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